1부 1장
2학년 3반 (2)
이서는 책상 위에 올려 둔 물병을 한 번 돌려 놓았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여서였다. 좀 전까지의 적막이 무색할 정도로 주변은 금세 다시 시끄러워졌다.
「야.」
갑자기 가까운 데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윤가온이 자기 옆줄 통로에 반쯤 걸쳐 서 있었다. 완전히 가까운 것도 아니고, 멀리서 부른 것도 아닌 적당한 거리였다. 타인과의 미묘한 간격을 재는 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 물병 계속 돌리고 있더라.」
이서는 손을 멈췄다.
그제야 자기가 아까부터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
대답이 너무 짧았다고 느낀 건 그 다음이었다. 가온은 전혀 걸리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긴장했냐?」
말투는 가벼웠다. 놀리듯이 붙는 말도 아니고, 진지하게 캐묻는 방식도 아니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걸 말로 꺼내 본 사람 같았다.
이서는 물병에서 손을 떼며 어깨를 조금 움직였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정도 아닌 애들은 보통 병을 그렇게 안 돌려.」
가온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바로 앞 빈자리에 책상 모서리만 걸쳐 기대앉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혀 오는 천연덕스러움 때문에, 오히려 이서는 잠깐 더 말을 못 이었다.
가온은 그런 침묵을 굳이 메우려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이서의 공책을 한 번 보고, 전자 칠판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이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재밌긴 하네.」
가온이 말했다.
「첫날부터 그렇게까지 겁주는 담임은 오랜만이라.」
이서는 그 말에 작게 웃을 뻔했다.
가라앉아 있던 교실이 이제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고는 해도, 그걸 이렇게 가볍게 바꾸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부터 이랬었을까.」
이서가 물었다.
「2학년은.」
가온이 한쪽 어깨를 들썩였다.
「작년보다야 그렇겠지. 1학년 땐 다들 사고 안 나는 선에서 끝냈었잖아. 올해는 대놓고 분류에 들어가겠다는 거고.」
잠깐 말을 끊었다가, 조금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뭐, 우리한텐 원래 늘 그런 학교긴 했지만.」
우리한텐.
이서는 그 표현이 묘하게 남는 걸 느꼈다. 그냥 이 반 학생들 전체를 묶어서 한 말일 수도 있었고, 1집단 적성반을 뜻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은, 자기도 그 안에 슬쩍 포함시켜 놓는 식으로 들렸다.
이서는 괜히 창가 쪽을 한 번 봤다.
가온은 그 시선까지 따라가지는 않았다. 그냥 자기 리듬대로 말을 이었다.
「근데 너는 좀 의외였다.」
이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아까.」
가온이 턱끝으로 교탁 쪽을 한번 가리켰다.
「질문 쏟아질 때 완전 안 듣는 얼굴은 아니더라. 난 네가 그런 거 제일 빨리 흘릴 줄 알았는데.」
그 말은 생각보다 정확했다.
이서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회수율이나 잔류량 같은 단어가 자기 귀에 유독 오래 남았다는 걸, 방금 처음 말을 튼 애한테까지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기에도 조금 늦었다.
가온은 그 짧은 틈을 그냥 받아 넘겼다.
「아니면 실습조 때문인가.」
「...다들 신경 쓰잖아.」
「그건 맞지.」
가온은 너무 쉽게 수긍했다.
그 덕분에 이서는 괜히 변명한 기분에서 조금 벗어났다.
뒤쪽에서 누가 가온을 향해 말했다.
「야, 너는 뭘 그렇게 여유냐.」
「뭐가.」
「실습조. 넌 어차피 좋은 데 갈 거 아냐.」
가온은 뒤도 제대로 안 돌아본 채 그저 손만 휘저었다.
「그건 가 봐야 아는 거고.」
「그 말 제일 짜증남.」
「짜증나면 네가 대신 가든가.」
뒤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핀잔과 농담이 섞인 소리였는데, 어색하지 않았다. 이서는 그 짧은 주고받음을 듣다가 괜히 가온을 다시 봤다.
역시 설명 없이도 아는 애라는 느낌이 있었다. 누가 실습을 잘하고, 누가 괜히 과장하고, 누가 지금 긴장해서 말이 많아졌는지. 그런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무겁게 드러내지 않는 쪽.
가온은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모를 얼굴로 물었다.
「왜.」
이서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냥 떠오른 걸 말했다.
「인기 많네.」
가온이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
「그건 또 무슨 결론이야.」
「그럼 아닌가.」
「아닌 건 아닌데.」
가온은 책상 위에 손가락을 두드리다 말고 덧붙였다.
「그냥 오래 봐서 그런 거지. 작년부터 같은 애들이잖아.」
대단한 말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이서 쪽에서는 거기서 말이 끊겼다.
오래 봐서.
그건 당연한 말이었고, 그래서 더 애매했다. 일부는 다른 반이었다고는 해도, 이 반 대부분은 서로를 작년부터 봐 왔을 텐데, 자기는 왜 아직도 늘 반 박자씩 늦는 기분이 드는지. 먼저 말을 못 거는 건 자기 문제였고, 먼저 걸어오는 애가 드문 것도 사실이었다. 둘 다 틀린 건 아닌데, 같이 놓고 보면 늘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가온은 그 침묵을 한 번 보고 나서,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너 창가 자리 좋아하냐?」
질문이 너무 갑자기 튀어서 이서는 잠깐 멈췄다.
「딱히.」
「그럼 왜 그렇게 아까부터 밖을 많이 봐.」
「그냥...」
이서는 창밖 실습동 방향을 떠올렸다.
「저기가 보이니까.」
가온도 그제야 창밖을 한 번 흘끗 봤다.
운동장 건너 실습동 외벽은 여전히 빛을 받아 희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가온은 그쪽을 오래 보지 않고 금방 시선을 거뒀다.
「아.」
그는 짧게 말했다.
「그건 좀 그렇지.」
그 대답은 설명이 너무 적어서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물었다.
「뭐가.」
「저 건물.」
가온이 말했다.
「맨날 멀리 있을 땐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가까워지면 갑자기 학교 아닌 느낌 나잖아.」
이서는 이번엔 정말로 조금 웃었다.
가온도 그 반응을 보고 같이 웃었다. 대단한 공감이나 합의가 있었던 건 아닌데, 방금 전보다 공기가 덜 낯설었다. 그냥 같은 장면을 비슷하게 봤다는 정도의, 설명하기 어려운 가벼움이었다.
그때 앞쪽에서 누가 가온을 불렀다.
「윤가온.」
「어.」
「너 작년 겨울 실습 때 진짜로—」
가온은 뒤돌아보며 「그 얘기 또 하냐」 하고 바로 받아쳤다. 말끝이 가볍게 붙는 걸 보니, 익숙한 장난이었다. 누군가 「아니, 얘한테도 말해 줘야지」 하고 이서 쪽을 슬쩍 보자, 가온은 대놓고 막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도 않은 채 반쯤 웃는 얼굴로 있었다.
그 애매한 태도가 오히려 편했다.
이서는 이런 사람을 많이 본 적이 없었다.
반대편 앞줄 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아주 얇게 났다.
이서는 무심코 그쪽을 봤다.
서연주가 공책 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까부터 계속 필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페이지가 바뀌는 타이밍이 조금 이상했다. 필요한 내용을 적고 있다기보다, 방금 교실 안에서 오간 말들의 순서를 정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연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연주라면 지금 교실 안에서 누구랑 누가 처음 말을 섞었는지까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온은 다시 몸을 돌려 이서 쪽을 봤다.
「아무튼.」
그가 말했다.
「너 생각보다 덜 재미없네.」
이서는 눈을 깜빡였다.
바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색한 말이라, 반응이 조금 늦었다. 가온은 그걸 보고 바로 웃었다.
「표정 왜 그래.」
「무슨 말이야?」
「좋은 뜻인데.」
「전혀 안 그렇게 들리는데.」
「그럼 내가 말을 잘못했네.」
가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태도 때문에 이서는 조금 늦게 웃었다. 이번에는 따라 웃을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가온은 그걸 본 뒤에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 앉을 때처럼 일어나는 것도 가벼웠다. 괜히 오래 머물렀다는 티를 남기지 않는 쪽이었다.
「나중에 공지 뜨면 보자.」
그가 말했다.
「괜히 너무 굳어 있진 말고. 진짜 그러면 더 이상해 보여.」
끝까지 장난 같은 말투였지만, 완전히 장난만은 아닌 말이었다.
이서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가온은 그걸 확인한 뒤 자연스럽게 자기 쪽 무리로 돌아갔다. 누군가 바로 말을 붙였고, 그는 아까 끊겼던 대화를 아무렇지 않게 이어받았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교실 공기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방금 들은 말 하나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생각보다 덜 재미없네.
좋은 말인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가볍게 던졌는데도 너무 쉽게 사라지지 않는 말.
이서는 물병을 다시 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창밖이 아니라, 한 번 가온이 돌아간 쪽을 봤다.
멀리서 보면 별일 없는 쉬는 시간 같았다.
이서의 학교생활에, 아주 작은 접점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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